12월 달력이 등장하자 크리스마스트리가 거실로 소환되었다. 얼마 안 가서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소원카드를 매달았다. 아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니 산타할아버지는 좋겠다. 무수한 소원 여러 개 빌고 민망한 어른보다 나은, 단 하나의 분명한 바람. 순수하고 소박하다.
전쟁을 피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타샤의 소원은 뭘까. 일상의 작고 구체적인 바람 틈에서 가장 절실한 소원 하나는 단언컨대 종전일 거다.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 자신이 일하던 일터로 돌아가는 것. 이혼한 러시아의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만나는 것. 그런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겠지.
러시아가 침공하자 나타샤의 아버지는 딸을 국경 밖으로 보냈다. 폴란드에서 프랑스까지 유럽을 전전하다 2021년 4월 30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15년 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 키를 훌쩍 넘어선다. 빨강머리앤처럼 양 갈래로 머리를 따고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그녀, 의지와 상관없이 난민이 된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을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바꾸고 있었다.
2004년 KOICA 해외봉사단으로 우크라이나 정수리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나는 그곳에서 일찍부터 다문화를 경험했다. 일부러 대사관에서 사물놀이 악기를 빌려서 방과후에는 사물놀이를 가르쳤는데, 한국 대표로 세계민속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았는데 소수 민족 문화보존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길거리나 트램에서 못난 애들이 “끼따이 끼다이(중국사람)”라고 놀리기도 했다. 분개해서 “나 중국사람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되받아친 적도 여러 번이지만 외국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방인이 되고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과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질감을 지워갔다.
한편으론 그때부터 재외동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 학위논문도 일제강점기 의거보도에 관한 연구를 했을 정도로, 연해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리코프 정수리학교는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초중고가 통합된 학교였고, 전교생이 200명이 안 되는데 고려인 학생은 20명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은 다른 지역의 고려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학생이 늘어서 그 정도였다. 외국어로 한국어를 꼭 이수해야 하는 그 학교에 현지 학생들 비율이 더 높았으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대단하다.
낮에는 정규수업을 하고, 아침에는 1교시 전에 한국어과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특별수업을 열었다. 오후에는 사물놀이 연습을 하고 밤에는 고려인 어르신들을 위해 한국어수업을 열었던 시절, 참 바쁘게 살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름 민간외교관이라는 자부심으로 보낸 2년 1개월, 한국에 돌아와서 다문화와 관련된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됐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동시대 지도상의 여러 나라가 내전 속에 고통스러울 때도, 아프간에 미사일이 떨어졌어도,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어도, 지금처럼 무거운 마음이었던가. 걱정과 탄식은 당연했겠지만 말이다. 내 발길을 스쳐갔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누군가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가족이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거리를 수없이 오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그 거리가 달라지는 풍경을 한 해 두 해 함께 바라보았고 추억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처 연락도 닿지 않는 그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터전이 무사하기만을 기도한다. 전쟁이 앗아간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나. 아직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총성이 울린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까지. 세계가 포화 속으로 뒤엉키게 되는 것은 막아야만 할 텐데.
한겨울이면 두통이 찾아든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을 되찾고 보니, 머리를 감고 0교시 아침수업을 하러 학교에 달려가다 보면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추위를 싫어했던 내가 영하 27도면 감기방학을 하는 그곳에서, 겨울마저도 아름답다고, 단단히 두꺼워진 눈길을 밟으며 아이들을 만나러 가던 24살의 나에게 닿았다.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회상이란 사치겠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1년이 넘었다. 한국생활에 적응한 나타샤는 내 도움 없이도 잘 살고 있다. IT전공자지만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쉬는 날엔 서울, 부산에 여행도 간다. 우리 가족은 연휴에 나타샤를 위한 시간을 비운다. 일정이 맞으면 함께 하고 어려우면 부담 주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서 기다린다.
‘품다’는 디아스포라 아카이빙의 일환으로 결혼이주여성을 포함해 재외동포, 외국인노동자, 난민에 대한 관심을 글로 옮긴다. 그들 삶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기록하고 싶다. 여유롭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싶다. 1년 반이 지났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타샤의 한국생활, 그녀를 위해 책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11월 초 그녀의 이삿짐을 인천으로 옮겨주었다. 조금 뒤로 미루고.
11월에 충남사회혁신센터 <로컬은 콩밭> 지원을 받아 ‘이민자를 품다_이중언어로 만드는 자서전 or 사진첩’을 기획했다. 이중 국적을 보유하고 이중적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전후좌우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과 자기 삶을 기록하는 경험을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홍성이주민센터를 통해 3분을 추천받았다. 원래 자기돌봄 글쓰기 ‘나를 품다’는 15주에 걸쳐 시간을 들여 나를 찬찬히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진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이중언어사진첩으로 방향을 정했다. 결혼하면서 중국에서 온 장예지님, 베트남에서 온 박지연님, 캄보디아에서 온 앙나리님. 세 분 모두 하루를 쪼개 통번역사로 일하며 공부를 계속하는 대단한 분들이다. 육아, 살림도 거뜬히 해내고, 한국 사람들보다 더 바쁘게 일상을 살아간다. 외국어강사, 다문화강사, 세계전래놀이강사로 여러 교육에 참여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는 그네들과 나 또한 시간을 정하지 못하고 만남을 이어갔다. 셋이 다 같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시간이 될 때 한 명씩, 두 명씩 다녀간다.
글을 쓰고 사진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선별하고 나의 삶을 스토리로 다시 엮는 과정에서 어려서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 분도 있고, 고향집에 있어서 사진을 못 구한 경우도 있다. 가슴 아픈 사연은 모두 공유하지 못했다.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만큼 완벽하게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분도 있다. 축사와 농사일, 강의 일에 치여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한 분도 있다. 그럼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돌봄, 나를 돌보고 품는 거라고 나는 누누이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나온 삶은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를 디자인한다. 나를 통해 가족과 지역사회,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낯선 타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떠올려본다. 그 상처를 덮고도 남을 만큼 사랑도 받았을 것이다. 엄마가 되고 많은 것들을 이루며 하루 하루 성장하는 그녀들이 한국과 고국의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내 일상을, 내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더 평온해지길 바란다. 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차가움도 함박눈처럼 포근해질 때가 있다. 동장군의 입성에도 의연한 나무들을 보며 몇 겁을 걸치고도 한기를 느끼는 나를 돌아본다. 곳곳에 평화가 넘치기를, 정치·경제·외교·종교 군사적인 목적으로 칼날이 서로를 향하지 않기를, 이 땅에 또는 저 너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기를 바라며 이민자를 품다.


구나경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는 자기돌봄 리더 GURU. 홍성군 내포신도시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품다’를 모토로 ㈜자기돌봄연구소 아카이브 ‘품다’를 운영하고 있다. 타로점성학 기반 네이탈차트 별별 상담과 자기돌봄 글쓰기를 통해 나를 품도록 돕는다. 특히 자서전 출간을 통해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웰빙과 웰다잉의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시리즈 소개
서울이 아니더라도,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천안에서 무료 또는 저렴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정보를 천안 토박이인 필자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또한 로컬 디자이너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다.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다.
12월 달력이 등장하자 크리스마스트리가 거실로 소환되었다. 얼마 안 가서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소원카드를 매달았다. 아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니 산타할아버지는 좋겠다. 무수한 소원 여러 개 빌고 민망한 어른보다 나은, 단 하나의 분명한 바람. 순수하고 소박하다.
전쟁을 피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타샤의 소원은 뭘까. 일상의 작고 구체적인 바람 틈에서 가장 절실한 소원 하나는 단언컨대 종전일 거다.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 자신이 일하던 일터로 돌아가는 것. 이혼한 러시아의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만나는 것. 그런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겠지.
러시아가 침공하자 나타샤의 아버지는 딸을 국경 밖으로 보냈다. 폴란드에서 프랑스까지 유럽을 전전하다 2021년 4월 30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15년 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 키를 훌쩍 넘어선다. 빨강머리앤처럼 양 갈래로 머리를 따고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그녀, 의지와 상관없이 난민이 된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을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바꾸고 있었다.
2004년 KOICA 해외봉사단으로 우크라이나 정수리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나는 그곳에서 일찍부터 다문화를 경험했다. 일부러 대사관에서 사물놀이 악기를 빌려서 방과후에는 사물놀이를 가르쳤는데, 한국 대표로 세계민속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았는데 소수 민족 문화보존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길거리나 트램에서 못난 애들이 “끼따이 끼다이(중국사람)”라고 놀리기도 했다. 분개해서 “나 중국사람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되받아친 적도 여러 번이지만 외국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방인이 되고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과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질감을 지워갔다.
한편으론 그때부터 재외동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 학위논문도 일제강점기 의거보도에 관한 연구를 했을 정도로, 연해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리코프 정수리학교는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초중고가 통합된 학교였고, 전교생이 200명이 안 되는데 고려인 학생은 20명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은 다른 지역의 고려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학생이 늘어서 그 정도였다. 외국어로 한국어를 꼭 이수해야 하는 그 학교에 현지 학생들 비율이 더 높았으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대단하다.
낮에는 정규수업을 하고, 아침에는 1교시 전에 한국어과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특별수업을 열었다. 오후에는 사물놀이 연습을 하고 밤에는 고려인 어르신들을 위해 한국어수업을 열었던 시절, 참 바쁘게 살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름 민간외교관이라는 자부심으로 보낸 2년 1개월, 한국에 돌아와서 다문화와 관련된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됐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동시대 지도상의 여러 나라가 내전 속에 고통스러울 때도, 아프간에 미사일이 떨어졌어도,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어도, 지금처럼 무거운 마음이었던가. 걱정과 탄식은 당연했겠지만 말이다. 내 발길을 스쳐갔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누군가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가족이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거리를 수없이 오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그 거리가 달라지는 풍경을 한 해 두 해 함께 바라보았고 추억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처 연락도 닿지 않는 그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터전이 무사하기만을 기도한다. 전쟁이 앗아간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나. 아직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총성이 울린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까지. 세계가 포화 속으로 뒤엉키게 되는 것은 막아야만 할 텐데.
한겨울이면 두통이 찾아든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을 되찾고 보니, 머리를 감고 0교시 아침수업을 하러 학교에 달려가다 보면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추위를 싫어했던 내가 영하 27도면 감기방학을 하는 그곳에서, 겨울마저도 아름답다고, 단단히 두꺼워진 눈길을 밟으며 아이들을 만나러 가던 24살의 나에게 닿았다.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회상이란 사치겠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1년이 넘었다. 한국생활에 적응한 나타샤는 내 도움 없이도 잘 살고 있다. IT전공자지만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쉬는 날엔 서울, 부산에 여행도 간다. 우리 가족은 연휴에 나타샤를 위한 시간을 비운다. 일정이 맞으면 함께 하고 어려우면 부담 주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서 기다린다.
‘품다’는 디아스포라 아카이빙의 일환으로 결혼이주여성을 포함해 재외동포, 외국인노동자, 난민에 대한 관심을 글로 옮긴다. 그들 삶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기록하고 싶다. 여유롭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싶다. 1년 반이 지났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타샤의 한국생활, 그녀를 위해 책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11월 초 그녀의 이삿짐을 인천으로 옮겨주었다. 조금 뒤로 미루고.
11월에 충남사회혁신센터 <로컬은 콩밭> 지원을 받아 ‘이민자를 품다_이중언어로 만드는 자서전 or 사진첩’을 기획했다. 이중 국적을 보유하고 이중적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전후좌우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과 자기 삶을 기록하는 경험을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홍성이주민센터를 통해 3분을 추천받았다. 원래 자기돌봄 글쓰기 ‘나를 품다’는 15주에 걸쳐 시간을 들여 나를 찬찬히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진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이중언어사진첩으로 방향을 정했다. 결혼하면서 중국에서 온 장예지님, 베트남에서 온 박지연님, 캄보디아에서 온 앙나리님. 세 분 모두 하루를 쪼개 통번역사로 일하며 공부를 계속하는 대단한 분들이다. 육아, 살림도 거뜬히 해내고, 한국 사람들보다 더 바쁘게 일상을 살아간다. 외국어강사, 다문화강사, 세계전래놀이강사로 여러 교육에 참여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는 그네들과 나 또한 시간을 정하지 못하고 만남을 이어갔다. 셋이 다 같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시간이 될 때 한 명씩, 두 명씩 다녀간다.
글을 쓰고 사진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선별하고 나의 삶을 스토리로 다시 엮는 과정에서 어려서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 분도 있고, 고향집에 있어서 사진을 못 구한 경우도 있다. 가슴 아픈 사연은 모두 공유하지 못했다.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만큼 완벽하게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분도 있다. 축사와 농사일, 강의 일에 치여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한 분도 있다. 그럼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돌봄, 나를 돌보고 품는 거라고 나는 누누이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나온 삶은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를 디자인한다. 나를 통해 가족과 지역사회,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낯선 타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떠올려본다. 그 상처를 덮고도 남을 만큼 사랑도 받았을 것이다. 엄마가 되고 많은 것들을 이루며 하루 하루 성장하는 그녀들이 한국과 고국의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내 일상을, 내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더 평온해지길 바란다. 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차가움도 함박눈처럼 포근해질 때가 있다. 동장군의 입성에도 의연한 나무들을 보며 몇 겁을 걸치고도 한기를 느끼는 나를 돌아본다. 곳곳에 평화가 넘치기를, 정치·경제·외교·종교 군사적인 목적으로 칼날이 서로를 향하지 않기를, 이 땅에 또는 저 너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기를 바라며 이민자를 품다.
구나경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는 자기돌봄 리더 GURU. 홍성군 내포신도시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품다’를 모토로 ㈜자기돌봄연구소 아카이브 ‘품다’를 운영하고 있다. 타로점성학 기반 네이탈차트 별별 상담과 자기돌봄 글쓰기를 통해 나를 품도록 돕는다. 특히 자서전 출간을 통해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웰빙과 웰다잉의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시리즈 소개
서울이 아니더라도,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천안에서 무료 또는 저렴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정보를 천안 토박이인 필자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또한 로컬 디자이너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다.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