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품다


텃밭을 품다 ⓶ : 40분 거리를 오가며 농사를 짓다_시리즈(4)

2026-05-15

비염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보며 자책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건 물려주는 게 아닌데, 부모가 되면서 여과시키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어느 해 어머님이 주신 작두콩을 겨우내 끓여서 마시게 했는데 아이들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아 그때부터 일 년 내내 작두콩 끓인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작년엔 내가 심은 작두콩을 수확했다. 농약 한 번 안 주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큰언니가 작게 잘라 말려준 작두콩. 은은하게 고소하다. 그해 겨울은 더 구수하다. 더 감사하다. 확실히 아이들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가 덜 들렸다.

 

2년 동안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어준 내포 텃밭정원을 분양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어찌나 섭섭하던지. 이때 텃밭을 대신한 건 내가 나고 자란 친정집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비어있던 친정집도 관리할 겸 가족들과 내가 누렸던 수확의 기쁨도 나눌 겸 용기를 냈다.

 

“40분이 넘는 거리를 어떻게 다니려고?”

 

농사 지으러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무리라는 P에게 나는 보란 듯이 수업이 없는 날이면 운전대를 잡았다. 3월을 며칠 남기고 방치된 땅에 거름도 주었다. 밭 전체는 엄두도 못 내고 10분의 2라도 손 빌리지 않고 퇴비 자루를 날랐다. 뜯고 쏟고 뿌리는데 허리를 몇 천 번은 구부렸다.

 

“허! 기가 찬다.”

“나의 클래스는 당신의 상상 이상이거든!”

 

내가 뿌린 퇴비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P에게 나도 큰소리를 쳤다. 민망하게 다 드러낸 땅덩어리에 온기 이불이라도 씌어준 것 마냥, 의기양양하게.

 

4월 16일, 창고 옆의 작은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심었다. 비트, 상추, 양배추, 시금치, 고추, 딸기, 오이, 수박, 명이나물, 쑥갓, 방울토마토까지. P의 도움 없이 다 심었는데 결국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모종 사러 간 시장에서, 장날이어서 오랜만에 활기찬 그곳에서 사람들은 일상을 회복해 가는 데 세월호는 우리 기억 속에서 침몰한 듯했다. 코로나로 숨을 죽인 시장이 수면 위로 오르고, 세월은 흐르고 있었다.

 

“병아리는 어때?”

“우리 애들이 좋아하겠지?”

 

장날인데 병아리는 없고 작은 닭들만 있다. 다음 장날에 오라는데 어찌 될지 모르니 청계 6마리를 산다. P가 아직 밤에는 춥다고 타이머로 불빛도 달아 주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어색할 거다. 언젠가는 이 녀석들이 우리 강아지 두 마리 눈치를 보며 마당 한가운데를 돌아다니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들고양이까지 생각이 미친다.

 

한여름, 뜨거움을 토해내는 밭에선 눈길을 거둔다. 여기저기 고추 심은 농가는 매운 고랑을 오가느라 속이 타들어 가는데, 밥상에 올릴 몇 개 심어둔 나는 안도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 대신 몇 가닥 튕기고 싶은 전선 위로 참새는 부른다. 조잘조잘 너의 일과로 함께 들썩일 구름 기다리고 있다고.

 

참깨를 털자, 들깨가 자란다. 제일 큰 밭에선 서리태가 자란다. 고구마도 대기 중이다. 옥수수 대를 베어내고 무와 배추를 심었다. 비트와 양배추가 자라던 자리엔 쪽파가 자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농촌생활. 나야 일이 없는 날에나 가서 거들지만 큰언니는 수시로 드나든다. 작년, 농사를 지어보겠다던 욕심을 부른 옥수수 농사는 결국 실패했지만. 기다리고 거두고 다시 심으며 성실하게 돌본 시간에서 위안을 얻는다.

 

어느 날은 상담도 미루고 난생처음 상수리를 주웠다. 아침에 아이들을 보내고 과속으로 산속에 들어섰다. 해마다 선산에 상수리가 떨어졌을 텐데 나는 이제야 상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넓긴 또 왜 그리 넓은지, 그만두고 싶어도 자꾸만 상수리가 애원한다. 나도 데려가라고.

 

“아이고, 허리야.”

“난 무릎이 더 아프다.”
“난 손가락 아픈데.”

 

언니들과 몇 만 번을 수그렸을까. 한 알 한 알 담긴 자루는 무거워지고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스치면 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돌아서게 만드는 바람. 텃세 부리는 사람 없다는 것에 감사하며 바람 불면 또 떨어지는 자연의 이치에 감동하며 땀 흘린 시간. 100kg이 넘도록 우리 셋은 도란도란 행복을 주워 담았다.

 

며칠은 은행을 주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길가에 심은 은행나무, 해마다 넘치도록 은행잎, 은행알 떨어뜨리며 40년 넘게 우리집을 지켜주었다. 덕분에 어려서 기침이 잦은 나는 구운 은행을 먹고 자랐다. 노랗게 멋들어지게 자태를 뽐내는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켰는데 이젠 밑동만 남았다. 이듬해, 누가 묻지도 않고 나무를 베어버린 거다. 나무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처음으로 나서서 은행알을 주웠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식구들 나눠주고 팔아 보라고 해서 농민상회에 갔더니 알이 작다고 1kg에 겨우 1500원을 준다. 지난번에는 3천원부터 작으면 2천원이라더니 크기로 가격을 깎았다.

 

‘20kg에 3만원. 허’

 

줍고 밟아서 껍질 까고 씻어서 말린 대가라 하기엔 참 박하지만 함민복 시인의 시를 생각하면 박할 것도 없다. 그저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서, 가을처럼 나는 노랗게 익어갔다.

 

대봉과 단감은 며칠 지나야겠지만 홍시는 나무를 털었다. 40년이 넘었는데도 주렁주렁 행복을 달아놓는 감나무, 옥상에 올라가서 여기저기 작대기를 휘둘러 사정없이 바닥에 꽂았다. 더러 몇 개는 곶감을 만들었다. 감 하나에도 감사하는 가을! 5시 전에는 내포로 돌아와야 하니 늘 허둥대며 운전대를 잡는다.

 

하루는 청계가 8개월 만에 알을 낳았다. 보통은 몇 달이면 알을 낳는다고들 하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 실망하던 차다. 고양이 먹잇감이 된 녀석들 빼고 남아있던 두 마리가 결국은 작은 알 하나로 자신을 입증하고 만 거다. 닭장 속의 그들을 보며 또 한 번 기다림을 배운 나. 금방 싫증내고 마음 접어온 나날들을 돌아보며 감사를 배운다.

 

겨울이 가까워지자 들녘은 잠잠해지고, 해질녘 내포로 들어서는 나는 보았다. 하루 종일 수고한 해님 위해 달님이 바톤 터치 하러 나오는 순간, 마중 나온 그 마음이 애틋하다. 하루가 저문다. 자연은 너그럽고 노을은 다정하다. 빌딩이 가로막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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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경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록하는 자기돌봄 리더 GURU. 홍성군 내포신도시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품다’를 모토로 ㈜자기돌봄연구소 아카이브 ‘품다’를 운영하고 있다. 타로점성학 기반 네이탈차트 별별 상담과 자기돌봄 글쓰기를 통해 나를 품도록 돕는다. 특히 자서전 출간을 통해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웰빙과 웰다잉의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시리즈 소개

서울이 아니더라도,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천안에서 무료 또는 저렴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정보를 천안 토박이인 필자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또한 로컬 디자이너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다.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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